성웅이순신

성웅이순신 서브 비쥬얼 플래시입니다.

테마분석

성웅이순신은 리더쉽을 갖춘 훌륭한 전략가이며 명장이며 탐구정신이 뛰어난 과학자이며 문학적으로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성웅이순신의 삶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고 이슈가 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다시보는 이순신과 원균

임진왜란은 조선사 전반에 걸쳐, 나아가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국난이었다. 이 7년 전쟁으로 인해 호남지역을 제외한 국토의 대부분이 초토화되었고, 4백여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손실되었다.
왜군은 4월 14일에 부산·동래를 함락시킨 이후 경상도·충청도를 거쳐18일 만에 수도인 한양까지 진격했고, 30일이 안되어 평양성을 점령했다. 개전초기 조선군은 육전에서 패배를 거듭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국왕이었던 선조는 북경의 의주까지 피신하였다.
육지에서의 위태로운 전세와는 달리 남해의 수군은 해전에서 적들을 격파하며 승전을 거듭하였다. 이로 인해 왜군의 수륙병진정책은 결국 좌절되었으며, 병참과 보급이 끊어지고 결국 조선군이 전세를 수습하고 반격에 나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조선수군의 분전과 더불어 육군은 관군과 의병, 승병이 함께 연합하여 적들의 북진을 차단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 김시민(金時敏)의 진주대첩(晉州大捷), 조헌(趙憲)의 금산전투와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김천일(金千鎰)·서산대사(西山大師) 등의 항전이 바로 그러한 결과이다.

그러나 왜적의 평양 이북으로의 북진을 차단하고 남쪽으로 몰아넣어 전황을 역전시킨 결정적 공훈은 수군에 있으며 그 주역이자 선봉에 바로 이순신(李舜臣)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정반대의 극점에 원균(元均)이 존재하고 있다.
이순신이 구국(救國)의 명장이자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반면 원균은 전란초기에 수군을 버리고 도주하려 하였으며, 이순신과 끊임없이 반목하고 대립하여 결국 모함으로 그를 조정에 압송시켰고, 칠천량(漆川梁)에서 단 한 번의 패전으로 삼도수군의 기반을 모조리 상실한 패장(敗將)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과론(結果論)적으로 보자면 원균이 세운 ‘작운 공적’ ―이 ‘공적’이라는 대한 범위를 어디까지 두는 가에 대한 문제가 원균 옹호론의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은 이순신을 모함하여 백의종군에 이르게 한 것과, 칠천량패전으로 인해 삼도수군을 전멸시킨 기록들 아래 덮이게 된다.
이러한 원균의 평가에 대해 다른 견해들이 있다. 《난중일기》나 《선조수정실록》 등의 원균에 대한 부정적 기록을 남긴 자료들 외에 《원균행장기》(대사헌 김간〔金幹, 1646~1732〕)나 《선조실록》 등을 근거로 다른 해석에 접근하고 있다.
이 사료들을 종합하여 원균의 신원복구와 명예회복을 모색한, 그리하여 원균 옹호론자들의 ‘고전적 이론서’가 된 서적으로 《원균을 위한 변명》(저자 이재범)이 있다.
이 자료는 그동안 제기되어 왔던 ‘원균 명장론’의 이론적 근거를 수집·서술한 것인데, 그 논거의 범위가 지극히 제한적이고 협소하다는 데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이제 《원균을 위한 변명》에서 주장하는 원균 명장론의 이론적 근거를 개괄적으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물론 저자를 비롯한 원균 옹호론자들의 주장대로 원균에게 내려진 혹평과 냉대가 어느 정도 오해로 밝혀지고 바로잡혀 조금이나마 명예를 복원할 수 있다고 해도 ―현재 존재하는 객관적 사료와 유물의 존재, 연구실적으로 보았을 때, 그 가능성에 대한 여부는 아직까지는 희박하게만 비춰진다― 이들은 결코 이순신에 대한 평가들을 역전시키지 못한다. 어떠한 반론으로도 이순신이 전위(前衛)의 개척자요, 민족의 영웅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균은 원주 원씨 19세손으로 고려공신 병부령(兵部令) 원극유(元克猷)의 후계이며, 원준량(元俊良)의 아들이다. 중종 35년(1540) 1월 5일에 태어난 그는 무예가 뛰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만호(造山萬戶)로 부임 중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부령부사(富寧府使)로 승진한 후 북병마사인 이일과 함께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정벌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원균은 당시 조정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었으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경사우수사(慶尙右水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경상우수영에 도임(到任)한지 두 달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원균 옹호론자들은 원균이 군선과 화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임란 초기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근거를 흔히 이 부분에서 찾는다. 즉 두 달이란 시간은 전쟁을 대비해 군비와 무기, 군선 등을 늘리거나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는데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시기는 선조 24년(1591) 2월 13일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이순신은 이 14개월의 기간 중에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군사들의 훈련에 노력을 쏟았다. 해전에서 적선을 격파하는데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거북선도 이때 만들어졌다.

임진왜란사에 있어 해전에서의 최초의 승첩(勝捷)은 1592년 5월 7일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함대가 벌인 옥포해전이다. 하지만 원균 옹호론자들의 견해는 이 사실을 반박하고 있다.
적의 침공이 시작되자 원균은 관문(關文)을 띄어 정세의 시급함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에게 알리고, 잇달아 적의 상황에 대해 통보해 주었다. 원균은 전라좌수영에 전황을 알려주는 한편, 의병장 강덕룡을 사천·곤양·고성 등으로 보내 수군을 모집하고 방어 함대를 편성했다. 원균은 이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그 결과로 적선 10여 척을 부수거나 불태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전승(戰勝)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수륙을 막론하고 최초로 거둔 승리라는 것이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장문포해전까지의 전투는 이순신이 독자적으로 수군을 지휘하여 승리를 얻은 것으로 해석하지 않는 의견이 있다. 즉 제2차 당항포해전을 제외하면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각 도의 수사자격으로 연합함대를 구성한 것이며, 어느 한 수사가 지휘권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다.
더 나아가 명분론(名分論)으로 보자면 오히려 경상우수사인 원균이 주장(主將)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해전의 구역이 경상우수영의 관할이며, 관활수사 또한 원균이고, 원균 자신이 관활 해역을 지키기 위해 전라좌수사에게 원병을 청하였고, 이순신은 이에 응하여 원균을 도와준 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이들 해전에서의 군공(軍功)이 이순신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연합작전 초기 원균은 이순신에게 두 사람이 공을 나누지 말고 연명으로 장계를 올릴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문제는 나중에 논의할 것을 얘기했고, 원균 역시 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원균과의 약속을 어기고 장계를 만들어 은밀히 보냈다. 그 장계에는 원균이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과 전공을 모두 이순신 자신에게로 돌려 기록되어있다.
조정에서는 이를 보고 이순신의 공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1년 후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원균이 크게 상심하여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록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찾고 있다.

그때 원균은 연명으로 장계코자 하니 순신이 가로되 “서서히 하자”하여 놓고 밤을 타서 스스로 장계를 보내면서 원균이 실군(失軍)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적을 친 공이 없음을 보고하니 원균이 이를 듣고 크게 유감으로 여겼다. 이로부터 서로 따로이 장계를 올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양인이 반목하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조

원균이 패장으로 평가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의 연합수군은 전멸하게 되고 남해의 제해권은 왜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기존의 평가는 원균이 전략·전술에 능숙하지 못한 장수이며 주색에 빠져 전투태세에 소홀했다는 것이 칠천량 패전의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원균의 패전이 책임전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불가항력의 요소가 작용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전세가 많이 달라진 것에 있다. 임진년 당시의 왜 수군 전선 수가 늘어났으며, 당파전술을 경험한 이후 전선의 내구력을 보완했다. 또한 기본적인 해전에서의 전술을 대폭 수정하여 전력이 상당부분 보완 또는 향상되었다.
왜 수군이 지리적으로도 유리한 조건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도 함께 주목한다. 당시 왜군은 부산에 진을 진성하고 있었는데, 부산 앞바다는 전함을 감추어 쉬게 할 만한 곳이 없고, 섣부른 공격을 감행할 경우 썰물로 인해 회항이 어렵다는 점이 있었다.
전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역시 이러한 연유로 거듭되는 공격명령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출전하지 않았던 것이었으며, 이것이 조정에 압송되었을 때 파직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도 거론되었다.

굴속에 들어있는 적은 육병이 아니고는 결코 구축하기 어렵다. 그들의 세가 꺾이는 때를 타서 수륙이 합공하기 위하여 경상우순찰사 김성일에게 재차 육병을 움직여 줄 것을 청했다.
《임진장초》

수군으로서는 굴 속의 적을 끌어내기 매우 어렵다. 부득이 육병과 합공해서 추출해서 섬멸해야겠다.
《임진장초》

이순신은 부산포를 효율적으로 공략하는 방법은 수륙병진전술이 최선이라는 전략개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은 이러한 사정에 대해 무지했으며 급기야 이순신을 압송하여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을 박탈했던 것이다.
원균은 충청병사로 있으면서 부산으로 진격할 것을 조정에 거듭 주장하였으며, 그에 대한 자신감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이순신이 모함으로 인해 조정으로 송환되고 통제사에서 파면되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수군통제사에 부임한 원균 역시 직접적인 전황을 보게 되자,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부산포에 진격할 수 없는 형편임을 파악했다. 그 역시 이순신이 주장했던 수륙군 연합작전의 필요성을 인지했던 것이었다.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하여 원균에게 부산 앞바다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원균은 전략상 어려움으로 인해 출전하지 않았다. 원균은 새로운 작전계획을 세워 3월 29일에 장계를 올렸다. 장마철인 7·8월과 파도가 심한 가을을 피하여 4·5월에 전군을 동원해 수륙양진작전으로 일거에 적을 몰아내자는 전략을 담은 내용이었다.

녹훈봉작교서

그러나 도체찰사였던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부산포 진격을 계속하여 재촉하였고, 원균은 출전을 거듭 미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권율은 군관을 시켜 원균을 원수부로 부른 뒤 곤장을 쳤다. 그는 더 이상 출전을 미루지 못하고 부산포로 나아갔으며, 칠전량에서 왜선의 공격을 받아 수군은 전멸하였으며 원균도 함께 전사했다.
원균은 전사하고 6년이 지난 1603년에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록되었다. 당시 공신을 책정하는 것은 의정부 등의 관청에서 대신들이 엄정한 심사를 거쳤다.
때문에 적어도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시기, 조정에서는 원균의 공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선조 역시 〈녹훈봉작교서〉에 원균의 전공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더불어 원균에 대한 평가가 비교적 호의적인《선조실록》과 달리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원균 옹호론자들은 그에 대한 평가가 후세에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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