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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웅이순신은 리더쉽을 갖춘 훌륭한 전략가이며 명장이며 탐구정신이 뛰어난 과학자이며 문학적으로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성웅이순신의 삶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고 이슈가 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의문

자살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전사에 관한 최초의 의문을 제기한 사람인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의 의견이 실려 있다.

공로 커도 상 못 탈 것을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 만고에 그 영혼은 어디 계신고. 들 구름만 한가하구나.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의문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었다. 우윤(右尹) 맹주서(孟胄瑞)는 [노량에서 이 통제사를 슬퍼함] (《이충무공전서》)이라는 시에 그 뜻을 담고 있다.

공(이순신)의 꾀에 힘입어 나라 붙들고, 강산을 다시 맑혀 국운을 텄네. 본시부터 그 한 죽음 뜻이 있거니. 뒷사람이 그 까닭을 어이 알리오.

이런 충무공 전사에 대한 의문의 글이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것으로 보아, 그 죽음의 의혹은 상당한 소문으로 퍼져 있었고, 공공연하게 조정에서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충무공전서》에 ‘또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이여( 1645~1718, 덕수 이씨로 이순신의 시장(諡狀)을 썼던 이식(李植)의 손자)가 정식으로 의문을 제기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숙종 때 인물인 이이명은 ‘이순신 장군을 조상하는 글’이라는 시에서, 이순신은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구속되어 처형될 자신의 운명을 알고 스스로 총탄에 몸을 내보였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의심하되 장군은 그 기미를 미리 알았음이여, 마침내 투구를 벗고 적진속으로 돌입한 것이라 하도다. 그러나 나는 본시 알고 있는 장군의 마음이니. 어찌 닥쳐올 화를 겁내어 자기 생명을 가벼이 하였으리오.

그러나 이이명은 이순신이 자신의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는 있었지만, 끝내는 함부로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이순신 자살론’에 대한 중요한 근거로 임진왜란 당시의 배경을 거론하는 의견이 있다. 선조 때 의병장이었던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옥사와 호남지역에 대한 왕과 조정의 불신을 이유로 하는 것이다.
김덕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에서 의병 5천 명을 일으켜 왜적들과 싸웠다.

장군(김덕령)이 죽은 뒤로 모든 장수들이 제 몸 보전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의심했던 것이어서,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생식하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 호남·영남 등지에서는 부자·형제들이 서로 의병은 되지 말라고 경계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이민서(李敏敍, 1633~1688)가 쓴 《충장공유사(忠壯公遺事)》에 실린 내용이다. 자신에게 죄가 없더라도 조정과 대신들의 미움과 무고로 죽게 될 것을 미리 알아차린 뒤, 죽을 시기와 장소를 골라 스스로 적탄을 빌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민서는 1685년에 ‘명량대첩비’의 비문을 적은 일이 있기도 하다.
의병장 김덕령은 임진왜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역모에 연루되어 처참하게 옥사했다. 이후 같은 의병장이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역시 김덕령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여 주어진 벼슬에서 사퇴하고 은거하였다.더구나 이순신은 이몽학의 반란 사건이 진압된 이듬해인 1597년 2월 28일 조정으로 압송되었고, 3월 4일에 구속되었다. 이로써 이순신은 한 순간에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서 파직되고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순신의 투옥에는 배후에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왜군의 첩자 요시라의 반간계(反間計) 외에도 조선 조정의 당쟁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인과 서인의 갈등·대립을 그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재조변방지》에는 이순신의 파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담고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더욱 심하게 갈라졌다. 서인은 원균의 편을 들고, 동인은 이순신의 편을 들어 서로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군대 일은 생각 밖에 버려두었으니, 그러고서야 나라가 망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일 뿐이다.

이순신이 파직된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원균이었고, 그는 서인의 거두인 윤두수(尹斗壽)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구속에 주력했던 세력은 서인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나국을 주장하며 최초로 상소를 올린 사람은 전직 현감 박성(朴惺)이었다. 그는 대북으로 분류되는 정인홍의 문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기 직전 ‘화의를 주창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는 결국 북인세력이 정적으로 있던 유성룡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축출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왜적이라는 외부의 적과 당색을 달리하는 조정중신들의 모함이라는 내부의 적을 두고 있던 상황에서 이순신은 토사구팽의 위기를 예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조 때부터 숙종 때까지 4대 왕조를 거치면서 1623년의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1659년의 효종 복상문제(孝宗服喪問題), 1689년의 장희빈 책봉과 기사환국(己巳換局) 등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 죄가 없어도 죽어갔던 당시의 정치적 배경이 자리했던 것이라는 의견이다.

기적(其敵) 많은 해전(海戰)에서도 不死神의 그가
어찌하여 이 海戰에서 戰死를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적탄(敵彈)에 맞아 죽었으니 戰死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戰死야말로 그가 스스로 택한 戰死가 아니었던가.…李舜臣 將軍은 적탄(敵彈)을 빌어 자살(自殺)한 것이다.
이순신이 싸움이 한창 벌어졌을 때, 고의로 투구와 갑옷을 벗고 적이 자기를 겨냥하여 조총을 쏘도록 유도함으로써 드디어 적탄에 맞아 자살했다는 말이다. 피상적으로 적탄에 맞아서 운명했으므로, ‘전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탄에 맞으면 꼭 죽도록 이순신은 투구와 갑옷을 고의로 벗었으므로 전사가 아니라, 자살이라는 것이다.
최석남, 《救國의 名將 李舜臣》

은둔설

전사, 혹은 자살설과 달리 이순신이 노량해전 당시에 죽지 않고 은둔하여 16년간을 더 살았다는 주장이 있다.
다시 말해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백의종군을 경험했고, 선조에게 의심과 미움을 받아 역적으로 몰려 죽을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치밀한 계획 끝에 죽음을 위장하고 목숨을 연명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은둔설’인데 그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사료는 그리 많지 않다.

이상하게도 (충무공이) 죽은지 80일이 지나서 장사지낸 이유가, 혹시 이순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가 정착되기를 기다리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순신이 그 때에 죽지 않았다면, 선조가 그를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고, 또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함께 죽였으리라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순신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했거나, 또는 죽음을 위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순신은 그 대에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그는 아산에 있는 자택 근처에 살아야만 할 형편은 아니었다. 즉 그에게는 본부인 방씨 이외에도 소실이 있었는데, 소실 소생으로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어디에로 가든지 가서 조용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조건도 갖추어져 있었다.
남천우, 《긴칼 옆에 차고 수루에 홀로 앉아》

위와 같은 주장은 은둔설에 대한 가능성을 충분히 제기하는 듯 하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순신이 전사하여 아산으로 영구(시신)을 옮긴 것이 12월인데, 장례를 치른 날은 이듬해 2월 11일이므로 80일 이상이나 경과된 이후라는 점이며, 둘째는 그로부터 15년 후(죽은 해로부터 16년 후에)그 산소를 600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다시 이장하였다는 점과, 셋째는 덕수 이씨 족보에는 이순신의 산소를 이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은둔설을 뒷받침할 만한 또 다른 근거가 있다.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쓴 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유형柳珩)은 평생에 이충무공이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에 감격하여, 그의 아들과 조카를 형제와 같이 하였으며, 사당과 비석을 세워서, 무릇 이공(순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誠意를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행장도 또한 공(유형)이 기초한 것이었다.

위 글에서 세 가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유형과 이순신이 매우 가까이 지냈던 사이임을 알 수 있고, 둘째는 충무공이 죽고 난 뒤에도 그의 사당과 비석을 세우는 등 성의를 다하였다는 것과, 셋째는 충무공의 행장(行狀)을 유형이 기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형의 행장을 기초로 하여 181년이 지난 1796년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이 《시장(諡狀)》을 썼는데 똑같은 내용이며, 그는 다음의 가장(家狀)을 썼다.

공(유형)은 이충무공의 지기(知己)를 감격하여 충무공의 아들을 보기를 형제(兄弟)와 같이 하였으며, 사당을 세우고 비(碑)를 세우기를 선영(先塋)에 같이 하였다. 일찍이 집 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공(순신)의 무덤에 비(碑)를 세우지 않는다면, 내 무덤에 비(碑)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유형의 묘

유형(柳珩, 1566~1615)은 해남현감을 했으며, 이순신의 휘하에서 적극적으로 보좌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의 무덤에 세울 비는 이순신의 비가 세워진 다음에 세우라는 우언을 남겼다는 것이 가장 특이하다. 유형이 1615년 2월 25일에 죽었으니,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이순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정상적인 사람의 죽음을 두고, 그것도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를 지냈고, 우의정(정1품)에 증직(1598. 12. 4)된 이순신의 무덤에 비석을 이 때까지 세우지 않았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유형의 이 유언의 내용이 이미 세워진 충무공의 비석을 다시 세우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또 한 가지 은둔설에 설득력을 실어주는 근거가 있는데, 바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에서 시작하여 관음포에서 해전을 지휘하던 1598년 11월 19일 이른 아침, 적탄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전사하던 순간 누가 그를 보좌했고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이분(李芬)의《행록》에 남아 있다.

곧 시체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공을 모시고 있던 몸종 금이(金伊)와 회(?)·완(莞) 등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이며,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宋希立) 등도 알지를 못했다.

이 때, 맏아들 회(32세)와 조카 완(20세)이 활을 들고 서서 울음을 삼키면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렸다.

지금 만일 발상(發喪)하면 돈 군중이 놀랄 것이요, 만일 적들이 이를 알기라도 하면, 기세를 얻어 반격해 올지도 모른다. 또 시체를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순신이 전사했던 순간, 그 주위에 참모가 단 한 명도 보좌하지 않은 채 단지 아들과 조카, 몸종 세 사람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함대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이순신이 전사했다면, 당연히 차상급자의 군관, 혹은 측근들이 이 지휘권을 넘겨받는 것이 당연한 논리이다. 그러나 《행록》에는 이순신이 전사한 뒤, 조카 이완이 독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때 이완의 나이는 겨우 20세에 지나지 않았을 뿐더러 야전 경험이 전무(全無)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전의 전투에는 한 번도 참전한 기록이 없는 완과 회가 이 관음포 해전에 처음으로 출전했다는 사실도 의구심을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은둔설의 근거로 삼는다면, 이들은 이순신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모의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군관 송희립과 그 외 측근들의 합의와 동조가 이루어진다면 완벽한 위장전사 시나리오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분이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기록을 조작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행록》의 기록에 나오는 가설들은 아무래도 논리적인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행록》 이외에 이순신의 전사한 장면을 기록한 다른 사료들을 살펴봐야 한다.
이순신의 후원자였던 유성룡의 《징비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이 싸움에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다가 날아온 적탄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황급히 그를 부축해서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이순신은 가만히 입을 열어, “지금은 싸움이 한창 급한 때이니, 아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하고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이순신의 말대로 그의 죽음 소식을 발표하지 않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싸움을 독려했으므로 군중에서도 그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물론 여기에서도 조카 이완이 전투를 독전했다고 묘사했지만, 이순신의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과, 그의 죽음을 좀 더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틀림없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직접 나서서 왜적을 쏘다가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고 배 위에 쓰러졌다.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 때 이문욱(李文彧 - 손문욱의 오기)이 곁에 있다가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면서 옷으로 시체를 가린 뒤에 그대로 북을 울리며 나가 싸웠다. 군사들은 순신이 죽지 않은 줄로만 알고 기세를 올리며 더욱 공격하여 적을 마침내 대패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쳐부수었다.”고 했다.
《선조실록》31년 11월 27일

도원수 권율이 “통제사 이순신이 죽은 뒤로는 손문욱 등이 정황에 맞게 잘 처리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문욱이 판옥선 위에 올라서서 적의 형세를 둘러보면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했다”고 보고했다.
《선조실록》31년 12월 18일

이 기록을 토대로 한다면, 충무공이 분명 적탄에 가슴을 맞고 배위에 쓰러진 뒤 전사했다는 사실과, 이를 지상군과 삼도수군을 지휘했던 도원수 권율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죽고 난 뒤에 손문욱이 전투를 지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이순신과 함께 종군했던 이분의 《행록》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안방준이 쓴 《노량기사(露梁記事)》를 살펴보면 전투의 최후상황이 상당히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송희립(宋希立)이 적탄을 이마에 맞아서 갑판 위에 쓰러져 기절(氣絶)하게 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다가 그도 또한 적탄(敵彈)에 쓰러지게 되었는데, 기절하였다가 정신을 차린 송희립은 옷을 째어 이마 상처를 동여매고 앉으려 하니, 이순신의 아들인 회(?)가 곡(哭)을 하는지라, 송희립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이순신의 갑옷을 풀어 그 시체(屍體) 위에 얹어 놓게 하고, 이순신을 대신하여 기치(旗幟)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독전(督戰)하니, 적군(敵軍)은 대패(大敗)하고 익사(溺死)하는 자 무수(無數)하고, 드디어 둔주(遁走)하거늘, 이에 비로소 이순신의 곡(哭)을 발(潑)하였다. 뒤에 공(功)으로써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任命)되었다.

이 글에 의하면 송희립이 이순신의 전사를 목격한 뒤, 독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행록》이외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신은 분명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으며, 그 후에 지휘권을 손문욱, 또는 송희립이 넘겨받았다는 좀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 된다. 이처럼 《행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료에서 이순신의 전사를 인정하는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논리적 모순이 지적되는 《행록》에 의존하여 은둔설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순신의 인품과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전쟁 중에 도피하여 전사를 가장한다는 것은, 폄훼적인 해석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살설에 대해서도 유효한 비판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장학근)’이다.

이순신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적탄을 빌어 죽음을 택한 것이던, 마지막 전투임을 알고 전사(戰死)를 위장하여 은둔생활을 한 것이던, 확실한 단정은 할 수가 없다.

동시에 두 가설을 뒷받침 할만한 결정적인 물증이나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존의 전사설을 전복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패의 경이적인 전공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과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이순신의 극적인 일생에 주관적 정서가 개입한 ‘동정론’적 가설. 그리고 무능한 조정과 왕실에 대한 상대적 비판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깔린 ‘음모이론’ 모두가 공증성과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한 연구와 이론적 근거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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