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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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1592년(선조 25) 4월부터 1598년까지 2차례 걸쳐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을 말한다. 1592년의 제1차 침입을 '임진왜란', 1597년의 2차 침입을 '정유재란' 이라고 하지만, 통상적으로 1,2차를 포함하여 '임진왜란' 이라고 말한다. 이 임진왜란을 두고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 케이초(慶長)의 역(役)' 이라 하며,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 으로 부른다.
조선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세

조선왕조가 지킨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은 명(明)과 사대(事大)관계를 유지하며, 일본·여진 등과는 교린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태종(太宗, 제3대 왕, 1397~1450)때 웅천(熊川) 개항을 시작으로 하여 세종(世宗, 1397~1450)때는 삼포(三浦 : 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항하였다.
그러나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폭동으로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고 곧 조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 인해 그곳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추방되었으며 양국의 교통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일본 측이 거듭 수교에 대한 요청을 해왔고 조선은 내이포만을 개항하여 교류가 유지될 수 있었다.

국내외의 정세변화에 따라 고려 말 이래 극성을 부리던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에는 다소 진정 기미를 보이는 듯하였다. 하지만 중종조 17년과 18년의(1523)의 침입, 39년(1544)의 사량왜변(蛇梁倭變), 명종 10년(1555)의 을묘왜변(乙卯倭變) 등 대략 10년을 주기로 왜구의 침략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을묘왜변 이후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거의 외교를 단절한 상태였고, 조선은 일본의 국내 사정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지냈다.

한편 조선은 정치와 경제면에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연산군 집권 이후 명종 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 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의 사이의 계속된 당쟁으로 인해, 정치 기강은 해이해지고, 전제(田制)와 세제(稅制)의 문란 등 여러 곳곳에서 폐단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중앙에서의 당쟁은 곧 지방으로까지 번져 국내는 정치적 불안 속에 놓여 있었으며, 부당한 관리 임명에 따른 시정의 문란으로 조정을 향한 백성들의 민심은 이미 떠났다. 더구나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노력과 관심은 찾아볼 수 없어 각 군영의 병기들은 녹슬고 있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실정을 파악한 조정이나 일부 정치인들이 이에 대한 시정과 방비에 관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 명령은 형식적으로만 행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후 나라 안팎의 실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조정에서는 여진족(女眞族)이나 일본의 군사적 침입에 대비한다는 뜻에서 비변사(備邊司)를 상설기관으로 설치하여 국방에 대한 강력한 방비책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1583년(선조16년)에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지만, 태평 속에서 당쟁에만 몰두하던 관리들에 의해 실현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조정의 무능과 부패는 당시의 수군과 육군을 막론한 일선 지휘관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들 지휘관들은 외형상의 위용만을 유지하는데 만족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군사들의 전투준비와 군비의 유지 등에 태만하여 변방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