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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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개척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

창의(創意)란 새 환경을 만들려는 의견을 생각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개척(開拓)은 그러한 의견을 새로운 방법과 발전적 태도로서 성취하는 것이다.
즉 종래에 만들어졌거나 제도에 대해 보다 낫거나 편리하게, 혹은 손길이 닿지 않은 분야를 새롭게 열어 만들어가는 정신이 창조로서 개척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창의와 개척이 제도에 반영된 국가는 번영과 문화적 융성함을 누렸지만, 그 반대로 창의와 개척이 박약하였을 때에는 그것이 국력에 미치고 몰락하는 과정을 밟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과, 전쟁 중에도 지속적인 전비태세를 유지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면모를 보였다. 영국의 G. A. Ballard가
“이순신 제독이 넬슨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기계발명은 곧 거북선과 총통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후에 임진왜란에서도 뛰어난 성능으로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왔을 때에는 전장에 대한 방비와 보수가 매우 소홀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충무공은 이 모두를 둘러보며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의견과 방법을 찾아내어 군사들의 훈련과 무기의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여수 진남관에 보존되어 있는 석인(石人) 역시 전선이나 배를 매어 두는 돌마저 옛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해전에서 뛰어난 화력을 자랑했던 거북선의 건조도 왜적의 침입을 미리 예견하여 대비한 것임을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저는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적선이 수백 척이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있었습니다.

안보에 대한 인식과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해이해져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새로운 전선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전선과 다른 점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전선건조에 들어가는 수많은 자재와 인력이 동원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한산도 진영에 있는 동안 수차례의 해전에서 얻은 문제점을 시정하고 보완하여 발전시켰으며 새로운 화기 제작에도 정성을 기울였는데, 왜군의 조총을 보고 그 성능과 화력을 높여 정철조총을 개발했다.

우리의 승자총통이나 쌍혈총통은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왜적의 조총만 같지 못하며 그 소리도 웅장하지 못하므로 정철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총신도 잘 되고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똑같습니다.정철로 만든 조총5자루를 올려 보내오니 조정에서 각 도의 여러 고을에 명하여 모두 제작토록 하여 서로 다루어 만들게 함이 좋겠습니다.

이 내용은 요즘의 포술장교의 분석보다도 뛰어난 화기분석능력이다.
또한 모든 업무의 평가에 있어서 자신의 공적을 앞세워 수군만의 공훈을 세우기보다 서둘러 대량생산을 하여 전 군이 적을 무찌르는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
명량대첩에서 13척의 전선으로 333척의 왜선을 맞아 31척을 격침시킨 후, 수군은 목포 앞바다 고하도로 통제영을 정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겨울을 날 방도가 막막한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재건사업에 노력하여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 즉 선박운행증과 같은 새 제도를 구상하고 시행하여 큰 배는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1섬씩을 바치고 증명서를 보유해야만 바다를 통행할 수 있게 했다.

이 제도의 시행 후 수영에는 1만여 섬의 군량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 해로통행첩 제도는 군량을 확보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남해와 서해를 드나드는 적의 간첩선 따위를 색출하거나 봉쇄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충무공은 여러 불리한 악조건 속에서도 창의적인 정신으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은 나라를 위해 지혜와 용기, 그리고 신념으로써 새 것을 찾아내는 자세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